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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1. <요재공>동지중추부사휘항순묘갈명(同知中樞府事諱恒順墓碣銘)
1. 문헌 목록 〉23. 23世 〉3. <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묘갈명(贈户曹叅判公諱成裕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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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행장(贈户曹叅判公諱成裕行狀)
贈户曹叅判公諱成裕行狀(증호조참판공휘성유행장) 公諱成裕字準瑞姓趙氏貫玉川即淳昌舊號也高麗大將軍門下侍中諱璋爲上祖生諱洪珪進士奉翊大夫行密直副使追封版圖判書生諱佺生員文科以其子元吉追封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生諱元吉字聖中謚忠獻進士登文乙科 高麗 恭愍朝檢校門下侍中 洪武己巳同鄭圃隱偰芸亭定策禁中立恭讓王有功官重推忠舊義翼載弼成克復功臣三重大匡兼典工判書封玉川君時我 太祖大王威德日盛天命人心已有所歸乃退居淳昌郡之金掘里自號農隱輿圃牧陶冶四隱相追逐切磨累徵不起奇圃隱詩曰病耳不堪聞世事滿川明月一簑衣 享于淳昌武夷書院與晦庵朱夫子及文良文肅兩薛先生共配而自松崖奉安時性潭宋先生煥箕製上樑文與奉安祝文配郡夫人靈光金氏復興趙氏扶餘金氏生諱瑛字英玉號樂齋官典工判書雲觀副正 太宗朝累徵以世子師傅吏曹判書皆不趙氏其弟虔谷瑜亦爲麗氏守節庚午丁外憂時當短喪獨公之兄弟食素三年居廬晨夕哀省見者感歎 世廟朝特命旌之曰孝子前副正趙某之閭而不以本朝職書之幷褒其忠也除靈光郡事漢城府尹不就終身稱前朝副正 太宗朝下敎美之曰父子三賢每月白風清自悼身世携一童子琴榼陟家後最高峰一夢彈一酌以自慰有時鼓琴間歇北望松京歌曰白雲知我心靑山如故人欲説亡國恨雲山黙似嚬俾後人因名其峰曰停琴黃頤齋胤錫贊曰昔史遷傳夷齊稱具得夫子而名益彰豈不信哉盖當麗季卓卓不貳之節古己記之矣苦公一家忠賢亦庶乎三仁配郡夫人延安金氏生諱龜山字雲浩生員承義副尉司正丁丙艱與其弟斐生員廬墓三年日述哀慕之意其文曰鳴呼先君早世鞠我二兒八旬有七哀痛軒墀劬勞罔極生諱士敦文科司諫正言生諱珩司正生諱甲宗副正生諱쀯字君命禀性忠直智畧絶倫蔭除主簿盡忠之誠雖賁育莫之敢奪建夫壬辰痛 宗社之危不勝慷慨與族孫府使德村公挺傳檄各處募得義士從高霽峯敬命錦山之戰奮發忠義斬賊數百賊徒惶刼曰趙將軍可畏也翌日以先鋒將出陣又斬無數及官軍潰義軍失勢尤不勝念激㪅整餘衆斬賊將數千級及勢窮力盡與僉使申楗縣監梁廷彦諸義將同日殉節七月十日也衣衾而葬錄宣武原從功勳事見德村倡義錄玉川同義錄士林請褒贈通政工曹叅議加 贈嘉善大夫兵曹判書五衛都摠府副摠管二傳至孟盛僉正生諱安老天禀魁偉德望有重生諱彦鳳叅奉二傳至諱士立天性忠厚謹恪持以律不事擧業嘗誨子弟曰以范氏七戒爲法無忝爾所生而認做定本以成家計生諱性良孝事父母志體俱養居前後喪務遵禮制若非喪事及不得巳之故暫不離苫公之五代孫成廉與京居再從成範請褒 贈敎官三傳至諱德弘 贈司僕寺正寔公祖也考諱殷國嘗訓羣子弟曰人之貴賤榮辱在於學與不學勿過少壯時而勉旃吾則未學後悔莫及 聖上壬辰 贈工曹叅議兼經筵叅贊官秘淑夫人昌寧曺氏貞靜和順閨範咸備 純祖己卯四月 日生公于淳昌茂林之第自就口食稍長岐嶷其遊戲也其動止也異於凡兒常侍長者應唯敬對長者有命即隨敏行人皆奇之性孝根天事親之道和敬純備志體俱養公之府君素嬰重疾百藥無效醫云花蛇爲當劑而時値隆冬存身之物巳無可見故號泣祝天連日廣求之際有一處冰雪先消一條長蛇自巖穴怳惚光射兩手徒獲忙忷而歸與其夫人同湔夫人李氏全州人世臣之女孝寧大君補后也亦有天賦之孝閨範備至善事舅姑敬對君子矣置蛇湯於案上至誠祝天拜謝訖先嘗而飲畢數頃快得蘇完以至益年而逝初終葬祭務盡禮制後喪妣克盡哀敬每當忌日先期四五日沐浴齊戒極其精 潔凡祭用穀物雖皮殼及雉雞之毛羽勿令踐踏棄之屏處其飯羹之需躬親執行盡誠盡敬慟器無異初終達夜不就寝其日不言笑不出入不食酒肉及其省歸也望邱壠而鳴泣撫松楸而盤桓辭歸之際不忍遽行復再拜不勝悲痛處昆弟雖分居各里第朝夕往來合而盡怡怡之道離則含爵陶之懷義訓家衆恩育奴僕至於雞犬亦有孝感之異如董生家雞抱狗乳待狗歸口不出毀譽之言足不踏是非之場杜門鞱跡務農救飢只修自己上職分而己則公之行槩此而自知矣士林薦剡 贈童蒙敎官加 贈嘉善大夫户曹參判同知義禁府事 以子貴推恩 幷旌其閭艮齋田公記之及公疾革顧謂夫人曰有何至罪早失怙恃又當戰兢啓其手足而其於命何願夫人誠享吾祖先之嗣續四歲乳孤在亦善敎養以續後事則幸莫幸矣語畢而從即甲寅八月十一也享年三十六也嗚呼痛矣以其年十月日葬于淳昌茂林面文峙里右峰桶山東麗亥坐原遠近坌集來哭曰君子沒矣吾生於何考德公之不幸及吾之不幸也若使吾公得壽非但是儀式於公之家門抑有振頹綱 國家之風化其所助亦不少胡爲乎早世己矣悲夫村人禁詞曲數個月矣配貞夫人李氏性行端一居常未嘗戲笑無故不出入夜行以燭無則止不叅於人家婚姻之會及其君子病㞃夫人裂指注口剌股煎湯竟得回甦以延十數日之命而考終于寝自後夫人能執未忘之禮不忘托孤之訓貞孤自守立孤之蹟有難於不從之烈夫人嘗有遺訓遺事其略曰一愛惡不曾隨人顏面苟且而必察以得其情一家素貧寠衣服飲食甚薄自奉然猶悦於施人得一嘉味則念家人不肯不匙筋一奉先盡誠敬祭饌極精潔一敎督子女未嘗假辭色每見人之徒愛而不知敎督者則輒非之曰徒愛反害於愛之之實一對人不或言他婦人之短處而或見多言之婦則戒之曰多言便是害巳德云一於奴僕盡撫育之恩得其歡心有一婢女至壬辰秋燒券嫁送噫夫人之懿行宜不止比詳於其孫完燁之錄故今不枚擧由是公之絶倫之孝行尤可觀於刑寡之德而夫人卓異之烈行擧此而益信矣故鄉里稱之曰某夫人之令儀令德實女中之男傑也此其善爲刑容之譽矣哉 聖上壬辰褒公孝之日幷旌其閭後公四十餘年癸巳六月五日卒以其年八月十二日葬于茂林芳花村上玉女峯下寅坐原移于潭陽龍面龍坪里後亥坐原生一男二女男曰恒順司果副護軍蒙通政陛嘉善同中樞府事女長適草溪鄭學聖郡事以適海州崔箕贊監察恒順娶全州李聖燦女生六男二女曰完珹都事又蒙通政敦寧府事曰完曄曰完植曰完龍曰完 曰完 一女幼長男完珹娶海州崔五衛將鍾植女次女適康津金煥豊次男完曄娶南陽房伯圭女次完植娶靈光丁相鉉女次完龍娶全州李承暉女長壻無育次壻女適坡平尹某男致英娶金某女玖九娶金某女完珹有二男長鎭秀次鎭杓女幼完曄有二女皆幼完植男鎭 比公之福履之未艾而内外曾玄多不盡記今其孫完曄抱家狀來示余因請修册之役噫公之卓行懿蹟巳有鄉黨之欽慕終至皐鳴 上徹恩床屢降雖旌表百世之遠猶不足以殫記況如余衰朽筆力何能稱道其萬一乎然欽慕德義之地終不獲辭遂据其大槩而誌之 金陵人 春雨 金永相 謹撰 증호조참판공휘성유행장(贈户曹叅判公諱成裕行狀) 공의 휘(諱)는 성유(成裕), 자(字)는 준서(準瑞)로 옥천조씨(玉川趙氏)이신데 옥천은 바로 순창(淳昌)의 옛이름이다. 고려때 대장군 문하시중(大將軍門下侍中)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그분의 아들 홍규(洪珪)는 진사(進士)로 봉익대부행밀직부사(奉常大夫行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요 아들 佺은 추은(推恩)으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광록대부옥천부원군(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에 추봉되셨다. 이분의 아들 원길은 자가 성중(聖中),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신데 진사로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셨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내시고 홍무(洪武) 기사년에 정몽주(鄭夢周) 설장수(偰長壽)등과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책립한 공으로 벼슬이 추충분의익대필성극복공신 삼중대광 겸전공판서(推忠奮義翼載弼成克復功臣三重大匡兼典工判書)에 오르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封)해지셨다. 이때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이성계(李成桂)를 말함)의 위세가 날로 성대해져 천명과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공은 이를 보고 순창군 금굴리(金掘里)로 낙향하여 스스로 호(號)를 농은(農隱)이라 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면서 사귀었으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으셨다. 공이 포은에게 준 시(時)에 이르기를, 귀가 시끄러워 세상일 듣지 못하고 病耳不堪聞世事 달밝은 내에서 도롱이 입고 낚시질하네 滿川明月簑衣 하였다. 순창의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회암(晦菴) 주부자(朱夫子:朱子 즉 朱熹를 말함) 및 문량공(文良公:薛公儉) 문숙공(文肅公:薛仁儉) 두 선생과 함께 배향(配享)되셨는데 봉안(奉安)할 때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상량문과 축문을 지었다. 군부인(郡夫人)은 영광김씨(靈光金氏) 복흥조씨(復興趙氏) 부여김씨(扶餘金氏)이시다. 이분의 아들 영(瑛)은 자(字)가 영옥(英玉), 호가 요재(樂齋)로 벼슬은 전공판서(典工判書)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내셨는데 태종(太宗)때 여러 차례 세자사부(世子師傅)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공의 동생 유(瑜) 역시 고려를 위해 절의(節義)를 지켰는데 경오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했다. 이때 상기(喪期)를 짧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공의 형제만은 소식(素食)을 하고 三年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조석으로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였으며 세종(世宗)때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리면서 「전부정(前副正) 조유(趙瑜)의 정려」라 하였는데 이는 조선에서 내린 관직을 쓰지 않아 그분의 충성까지 나타낸 것이다. 영광군 도사(靈光郡都事)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고려 부정으로 자처하니 태종이 아름답게 여겨 「세 부자가 모두 어질다.」라고 하였다. 요재공은 매월 바람이 시원하고 청명한 날이면 스스로 슬퍼하는 마음이 일어나 동자(童子) 하나에게 거문고를 지우고 집 뒤 높은 산에 올라가 거문고를 한 번 타고 술 한 잔을 들며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며 이따금 거문고를 타자 북쪽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 읊기를, 저 흰 구름은 내 마음을 알꺼나 白雲知我心 푸른 청산만 친구처럼 반기네 靑山如故人 나라 잃은 슬픔 이야기하려 하니 欲説亡國恨 구름낀 산이 말없이 찡그리네 雲山黙似嚬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그 산봉우리를 정금봉(停琴峯)이라 하였다. 이런 요재공의 사적을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선생은 찬미하기를 「옛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 백이(伯夷)전을 지으면서 『공자(孔子)의 기림을 받아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 말기를 당하여 탁월하게 뛰어난 절의(節義)는 예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의 일가(一家) 충절 역시 삼인(三仁)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배위(配位) 군부인(郡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는 휘 귀산(龜山)을 낳았는데 귀산은 자(字)가 운호(雲浩)로 생원(生員)인데 승의부위사정(承義副尉司正)을 지냈으며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그의 동생 생원 비(斐)와 함께 시묘(侍墓) 三年을 하면서 날마다 어머니를 애모하는 글을 지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아버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님께서 우리 두 아들을 기르셨다. 八十七歲를 살고 돌아가시니 애통하기 그지없고 길러주신 은혜가 하늘처럼 끝이 없다.」하였다. 이분이 사돈(士敦)을 낳았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과 정언(正言)을 지내셨으며 아들 훈(爋)은 자가 군명(君命)인데 천품이 충직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음보(蔭補:조상의 功으로 벼슬하는 일)로 주부(主簿)가 되셨는데 그의 충성심은 옛날 힘이 세기로 유명한 장사(壯士) 분육(賁育)이라도 빼앗지 못할 정도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분개하여 족손(族孫) 덕촌공(德村公) 정(挺)과 함께 각지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義兵)을 모집해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금산(錦山) 전투에 참가하였다. 공은 충의심을 발휘하여 왜적 수백명을 베니, 왜적들이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조장군은 겁이 나서 대항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선봉장이 되어 출전하여 무수히 왜적을 죽였으나 관군(官軍)이 패배하고 의병 역시 세력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공은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고 남아있는 군사를 정돈하여 적의 장수 수십명을 베고 힘이 다하여 첨사(僉使) 신건(申楗)과 현감(懸監) 양정언(梁廷彦) 등 여러 의병장과 함께 순절(殉節)하셨으니 이날이 七月 十日이었다. 의복을 거두어 장례지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임진왜란 때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勳號)에 녹훈되었다. 이런 사실은 『덕촌창의록(德村倡義錄)』과 『옥천동의록(玉川同義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림(士林)이 나라에 표창하기를 청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하였는데 나중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오위도총부부총관(兵曹判書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올려 추증하였다. 二대를 내려와 맹성(孟盛)은 첨정(僉正)이며, 그이 아들 안로(安老)는 첨품이 우뚝하고 덕망이 중하였다. 안로의 아들 언봉(彦鳳)은 참봉(叅奉)이다. 다시 二대를 내려와 휘 사립(士立)은 천성이 충후(忠厚)하고 근엄하였으며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셨다. 과거시험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범씨(范氏)의 일곱 가지 훈계를 모범으로 삼아 선조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표준을 세우고 집안을 일으키라.」하였다. 그의 아들 성랑(性良)은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부모님의 상(喪)에 예제(禮制)를 힘써 따르고 상사(喪事)에 관계된 일이나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빈소(殯所)를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五대손 성렴(成廉)과 서울에 사는 재종(再從) 성범(成範)이 표창하기를 청하여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다시 三대를 내려와 홍덕(弘德)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할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은국(殷國)인데 일찍이 여러 자제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의 귀천과 영욕(榮辱)은 배우느냐 배우지 않는 데 달려 있다. 젊은 날을 허송세월 하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 나는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다.」라고 하셨다. 성상(聖上) 임진년에 공조참의 겸경연참찬관(工曹參議兼經筵參贊官)을 추증하였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정숙하고 온화하시며 규범(閨範)을 두루 갖추셨는데 순조(純祖) 기묘년(一八一九)에 공을 순창 무림면(茂林面) 집에서 출생하셨다. 밥을 먹을 나이 때부터 모습이 우뚝하고 노는 것이나 모든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항상 어른들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면서 공손히 대하고 어른이 심부름을 시키면 즉시 민첩하게 행하니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 도리는 화평하고 공경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뜻을 받들고 음식을 봉양하는 데 힘썼다. 공의 아버지가 중한 병환이 나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화사(花蛇)를 먹으면 나을 수 있겠다.」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한겨울이어서 뱀을 볼 수가 없었다. 울면서 며칠 동안 뱀을 찾아다녔는데 한곳에 당도하니 눈과 얼음이 녹은 곳에 뱀 한 마리가 바위 속에서 찬란한 빛을 내며 틀고 있었다. 공은 두 손으로 그걸 잡아 급히 돌아와 부인과 함께 달여 드렸다. 부인 이씨(李氏)는 전주인(全州人) 세신(世臣)의 따님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역시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규범(閨範)을 두루 갖추셨다. 시부모를 공손히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뱀탕을 달여 상에 올려놓고 지성으로 하늘에 빈 다음 먼저 맛을 보고 바쳤는데 마신 지 얼마 후 완쾌되고 몇 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초상이 날 때부터 상기를 마칠 때까지 예제(禮制)를 잘 지켰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도 애경(哀敬)을 다하고 매양 기일이 돌아오면 四, 五日 전부터 목욕(沐浴) 재계(齋戒)를 하고 아주 정결하게 하였다. 모든 제수에 쓰는 곡식의 껍질이나 닭 등의 털까지도 사람들이 밟지 못하게 한쪽에다 버렸으며 메진지나 국 등은 손수 살펴 성의를 다하였다. 제사를 지내면서는 통곡하기를 초상 때와 다름이 없게 하였으며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셨다. 제삿날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웃지 않았으며 주육(酒肉)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또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하면서 울먹이며 소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머뭇거리다가 돌아왔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돌아가 재배(再拜)하고는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형제가 비록 분가하여 살았으나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우애를 돈독히 하여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섭섭해 하였다. 의리로써 집안 식구를 가르치고 은혜로써 하인들을 거느려 집안의 닭이나 개까지도 공의 효성에 감복함이 있는 듯하여 마치 동생(董生)의 집 닭이 강아지를 품어주면서 어미 개가 오기를 기다린 것과 같았다. 입으로 남을 헐뜯는 말을 내지 않았으며 시비가 있는 곳은 가지 않으셨다. 문을 닫고 은거하여 농사에 힘써 굶주림을 면하고 자기 수양을 제일의 직분으로 삼았으니 공의 행적은 여기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림(士林)이 추천하여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户曹參判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셨는데 이는 아들의 현귀(顯貴)로 추은(推恩)된 것이다. 모두 정려(旌閭)가 있는데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공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로 일찍 부모님을 잃고 이제 또 내가 죽게 되었소. 바라건대 당신은 우리 선대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네 살 된 어린 아들을 잘 가르치고 길러 후사를 잇게 해주면 더없이 다행이겠소.」하고는 돌아가셨다. 이때가 갑인년 八月 十日이며 향년 三十六세였으니 애통한 일이다. 그해 十月에 순창군 무림면 문치리(文峙里) 오른쪽 봉우리 통산(通山) 동쪽 기슭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훌륭한 군자(君子)가 돌아가셨으니 살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하랴? 공의 불행이 바로 우리들의 불행이다. 만약 공이 조금만 더 수를 누렸다면 공의 집안뿐만 아니라 무너진 기강(紀綱)을 바로잡고 나라의 교화(敎化)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일찍 돌아가셨는가? 슬픈 일이다.」하고는 몇 개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노래부르는 것을 금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성품이 단정하고 평소 함부로 농담을 하거나 웃음을 웃지 않으셨다. 까닭없이 출입을 하지 않고 밤에 다닐 때는 꼭 등불을 들고 다니고 등불이 없으면 나가지 않았으며 남의 혼사집에 참여하는 일이 없으셨다.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고 허벅지 살을 베어 고아드려 회생시켜 수십일을 더 살게 하여 고종명(考終命)하도록 하였다. 그후부터 미망인(未亡人)으로서 할 예(禮)를 다하고 남편에게 부탁받은 대로 아들을 기르며 수절하였으니 이는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참으로 열부인(烈夫人)이라 하겠다. 일찍이 유훈(遺訓)을 남겼는데 첫째 집안이 가난하니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되 남에게 베풀기는 기쁘게 하라.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든 집안 식구를 생각하여 얼른 수저를 대지 말 것이며 선대의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고 제수는 정결하게 장만하라. 둘째 자녀를 교육하면서는 얼굴빛을 꾸미지 말라. 매양 보면 한갓 사랑할 줄만 알고 가르칠 줄을 모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갓 사랑할 줄만 아는 것은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이다. 셋째 남을 대하거나 혹은 부인들의 단점을 말하지 말라. 더러 말이 많은 부인들을 보는데 말이 많으면 자신의 덕(德)을 해치게 된다. 넷째 하인들을 보살펴주어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사라. 그리고는 한 여종을 임진년에 종문서를 불태우고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부인의 아름다운 행실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손자 완엽(完曄)의 기록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낱낱이 적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공의 뛰어난 효행은 부인의 내조가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부인의 탁월한 효열(孝烈)을 여기에서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고향 마을에서 「이씨 부인의 아름다운 행실은 실로 여자 가운데서 남자다운 호걸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이는 부인을 형용하여 칭찬한 말이다. 성상(聖上) 임진년에 공의 효행을 표창하면서 부인에게도 함께 정려를 내렸다. 부인은 공이 돌아가신지 四十餘年 후인 계사년 六月 五日에 돌아가시니 그해 八月 十二日에 무림면 방화촌(芳花村) 위 옥녀봉(玉女峯) 아래 인좌(寅坐)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담양군 용면(龍面) 용평리(龍平里) 뒤 해좌(亥坐)로 이장하였다. 一男二女를 두었는데 아들 항순(恒順)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과(司果)와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志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큰딸은 도사(都事) 초계(草溪) 정학성(鄭學聖)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해주(海州) 최기찬(崔箕贊)에게 출가하였다. 항순은 전주(全州) 이성찬(李聖燦)의 딸에게 장가들어 六男 二女를 두었는데 완성(完珹)은 도사(都事)로 통정대부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오르고, 완엽(完曄) 완룡(完龍) 완준(完俊) 완홍(完洪)이며 딸은 어리다. 장남 완성은 오위장(五衛將) 해주(海州) 최종식(崔鍾植)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녀는 강진(康津) 김환풍(金煥豊)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완엽은 남양(南陽) 방백규(房伯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 완식은 여용(靈光) 정상현(丁相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 완룡은 전주 이승휘(李承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큰 사위는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둘째 사위의 딸은 파평윤씨(坡平尹氏)에게 출가하고 아들 치영(致英)은 김씨(金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치구(致九)는 김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완성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진수(鎭秀)이며 둘째는 진표(鎭杓)이며 딸에는 어리다. 완엽은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완식의 아들은 진○(鎭○)이다. 이상이 공의 복을 누린 자손이며 내외 증손과 현손(玄孫)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제 그의 손자 완엽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공의 탁월한 행적과 아름다운 자취는 이미 향리에게 흠모하여 마침내 조정에 알려서 여러 차례 추증하고 정려까지 내렸으니 백세까지 정표(旌表)하더라도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늙어서 필력(筆力)이 없는데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이나마 다 기록하겠는가? 그러나 그분의 덕을 흠모하고 있던 터라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대강만을 기록한다. 금릉인(金陵人) 춘우(春雨) 김영상(金永相) 삼가 지음
 
1. 문헌 목록 〉23. 23世 〉1. <요재공>동지중추부사휘항순묘갈명(同知中樞府事諱恒順墓碣銘)
1. 문헌 목록 〉23. 23世 〉3. <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묘갈명(贈户曹叅判公諱成裕墓碣銘)